본문 바로가기

역사경영89

죽을지언정 굴신하진 않는다 누르하치는 후금이 생기기 전 요(遼)에 맞서 금을 일으킨 아골타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선 이들은 모두 강력한 리더십으로 흩어져 있던 제 부족을 통합했다. 이들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남여진 지역으로 이동하려했으나, 그들의 진로는 한족에 의해 저지되었다. 불만은 여진사회 내부의 경쟁 원리를 통해 통합으로 이어졌고, 길들여지지 않는 오랑캐식 사고는 결국 중국에 무작정 목줄만 잡히고 있지 않았다. 요 최후의 황제가 1112년 사냥차 북부 여진의 송화강 유역을 방문했을 때, 황제는 여진족 추장에게 춤을 추어 보이라고 명령했다. 아골타는 춤추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아골타는 뼈에 사무친 치욕을 갚아줄 날을 기다렸다. 1115년 그는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요를 공격, 마침내 요를 멸망.. 2010. 7. 4.
대륙경영을 향한 드높은 상무정신 중국 한인(漢人)들의 기록인 에는 “고구려인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고 적혀있다. 또 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보통 걸음걸이가 마치 달리는 것 같다.“는 기록이 나온다. ‘걸으면 뛰고 뛰면 싸우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매사에 얼마나 신속한 자세를 보여주었는지 알게 한다. 절을 할 때에도 발 하나를 빼고 한다고 했는데, 이는 유사시 다음 동작을 민첩하게 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구려인은 매사에 빈틈없었다. 고구려인과 달리 중국에 협조적이었던 부여인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가 함이 있고 너그럽다고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인들을 얼마나 눈엣 가시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고구려 사람들은 상무정신이 드높아 무예를 숭상했다... 2010. 7. 4.
누르하치를 만나러 가는 길 나의 이번 답사 여행은 마침내 거병 66년만에 중국 대륙을 집어 삼킨 청태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가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명나라 두송이 군사의 태반을 잃은 혼하는 유유히 흐르고, 허투알라로 들어 서는 길, 비가 뿌린다. 누르하치의 조상을 모신 청영능에 들어 서는 길은 한적하고, 길은 열려 있다. 건물마다 제기가 차려져 있고, 무덤엔 영혼이 부활하라는 비나리가 담긴 나무가 자라고 있다. 불현듯, 여진족의 야생성은 아직 살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한민국 중소기업 CEO들을 모시고 나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와 함께 떠나는 답사 여행의 제목 을 이끌면서 참 많이도 느끼고, 감회에 젖었다. 1300년 전부터 400년 전을 거쳐 현재로 이어지는 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숨통을 닫았다 다시 열기를.. 2010. 6. 22.
태왕께 가는 길 “밭이 없어 아무리 힘써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울 수 없다."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고구려를 일대 동북아의 최강국이자, 대륙 경영의 거점으로 삼은 광개토평안호태왕을 찾아가는 길... 내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숙제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뻗어 나가지 않으면 주변 세력들에 의해 생존이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형국, 그러기에 피나는 생존 투쟁을 해야만 지속가능한 경영이 이루어지는 환경요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처한 여건 아닌가. 기업이 처한 여건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번 태왕 유적지 답사는 내게 태왕의 경영정신을 되새기며 천하경영 리더십을 익히게 한 계기였다. 그 정신을 되새겨 팍스코리아를 이루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2010. 6. 22.
백두산 가는 길 얼마전 신문을 보니까 백두산이 4~5년내 다시 분출할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백두산에 다녀온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그 소식을 접해 들은 느낌이 자못 가슴 두근거리게 했다. 백두산! 민족의 영산이자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모든 산맥들의 시원 - 그 산에 올랐다. 산은 - 심경호가 역어 낸 에 나오는 뭇 선인들의 글처럼 웅장하고, 가슴 설레게 하며, 벅차오름으로 나를 맞았다. 홍세태가 그러했을 것이며, 서명응이 그러했을 것이다. 특히 서명응(徐命膺)의 에는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진산으로 아래 백성들이 우러러봅니다 "라는 역자가 뽑은 제목처럼, 나를 흥분시키고, 울음 터지게 만들었다. 나는 이 조국, 한반도 떵덩이에 탯줄을 묻은 자식이자, 아들 아니던가! 그 산을 오르며, 동파, 남파가 아닌, 서파, 북파로 .. 2010. 6. 22.
두 손이 자유로우면 천하를 지배 한다 역사적으로 철제 등자(鐙子)의 등장은 이들 유목민들의 손을 자유롭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등자는 말을 탈 때 디디는 제구를 말한다. 적어도 3, 4세기까지 유목 기병들은 아시리아의 발판과 스키타이 인디안의 발(足)거리 쇠사슬처럼 철제 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제 말을 타면 두 발을 지탱할 수 있었고, 이는 두 손의 자유를 가져왔다. 가히 획기적인 발명품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두 손의 자유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는 기술을 급격히 강화시켰다. 이제 승마인들은 활을 당기면서 안장 발거리를 딛고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등자는 말 엉덩이 너머로 쏘는 파르티아식(式) 활쏘기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바로 이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 2010.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