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경영89

불모의 자연조건이 야생성을 강화시킨다 예로부터 농경민과 유목민이 만나는 접점은 조용할 리 없었다. 거기엔 교역이 있었고, 끊임없는 욕망이 들끓었다. 주로 이 지역의 자연 현상은 최소한의 강우량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물 부족은 주기적으로 흉년을 가져왔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교역은 쉽게 정치적인 관계를 가져왔다.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만일 중국의 힘이 약화되면 이는 곧 중국과 민족의 대결구도로 바뀌었다. 예컨대, “거란족이 세운 요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행정적으로 북경과 만리장성 바로 북장 현 열하지방에 중심지를 잡았다. 이 지역은 살 수 없을 만큼 춥고(열하에서는 1년중 100일만이 서리가 없는 날이다.) 강우량도 겨우 10내지 15인지 밖에 안된다.” 열악한 자연 환경에서 정복자는 나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업도 열악한 조건에서.. 2010. 5. 15.
고조선을 계승한 뿌리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믿기를 그들은 자신을 ‘천손(天孫)’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국가는 하늘의 자손들에 의해 통치되는 ‘천손국(天孫國)’이며, 그러기에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제국의 시민답게 고구려인들은 자주 의식이 매우 강했고, 민족 자아성이 무척 강했다. 고구려인의 독자적 천하관은 중국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같은 천손 개념은 중국 한족 왕조의 추상적인 천자 개념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당당한 독립 국가라는 점에서 보다 고구려다운 색깔이 뚜렷히 나타난다. 그러기에 모든 면에서 자신감에 가득 찼고 위풍당당했다. 이 같은 믿음은 천하를 경영하는데 거침없이 나타난다. 광개토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는 이런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능비의 서문과 모두루 묘지명에.. 2010. 5. 15.
고구려의 경영이념, 다물(多勿)사상 고구려는 우리민족이 세운 대표적 국가로 만주일대와 한반도 중부 이북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및 광범위한 해양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었다. 기원전 37년에 남만주에서 건국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북부여를 계승했는데, 북부여는 현재 북만주인 대홍안령 일대에서 남만주 일대에 걸친 반농ㆍ반유목의 나라였다. 고구려는 건국하자마자 주변에 있었던 소국들을 신속하게 병합해 나간다. 확장의 시점을 실기하지 않고, 국운융성의 기회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창업 이래 700여년 이상을 존속하면서 독특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주변종족들을 아우른 세계국가를 일구어냈다. 이 같은 팽창은 고구려인의 진취적 기상이 반영된 것으로, 막강한 군사력의 기초가 된다. 이런 연유.. 2010. 5. 15.
여진족(女眞族), 그들은 누구인가? 언어학상으로 볼 때 여진족은 퉁구스계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동북방 삼림지대에서 수렵이나 어로, 농경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송화강 상류 지역에서부터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 지역은 한때 우리 역사의 주역 중 하나인 발해가 번성한 곳이었다. 여진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 것은 1114년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한족의 요나라를 밀어낸 때부터이다. 중국 역사의 상당부분이 타민족의 역사라는 걸 보여주는 것은 중국을 다스린 주인이 언제든 변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래 표는 한족과 타민족 왕조 교체시기를 잘 보여준다. 13세기로부터 19세기에 걸친 시기에 중국은 공교롭게도 원(1271~1368), 명(1368~1644), 청(1644~1912)으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기가 있었다. 원은.. 2010. 5. 6.
그때, 동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누르하치가 등장하는 무렵은 원ㆍ명과 명ㆍ청의 남북 교체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북으로는 몽골과 여진이 병존하면서 몽골의 쇠퇴와 여진의 흥기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대륙의 패권을 겨눌 힘의 중심이 여진으로 넘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주인을 자처했던 몽골에는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 무렵 몽골은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채 약탈과 조공, 와시무역(瓦市貿易: 시장ㆍ장터에서의 거래를 통한 교역) 등으로 경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더구나 변화하는 대명 관계 속에서 몽골은 정치적으로도 체제 통합을 이뤄 내지 못하고 분열상을 보였다. 반면에 여진은 명과 조공ㆍ위소(衛所) 관계를 형성한 이래 와시 무역의 확대, 요동 한인 지배들을 통해 대외경제를 확대시키며 정치 조직의 통합을 .. 2010. 5. 6.
태왕의 무덤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 광개토태왕의 기록 중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그것은 태왕이 살아서 자신의 능을 지킬 수묘연호(守墓煙戶)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존시유교(存時遺敎)’라 한다. 즉, 태왕은 자신이 죽은 다음에 능을 지킬 수묘연호(守墓煙戶)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이 내원(來源)하게 된 배경, 능을 지킬 인가(人家)의 수, 태왕 자신이 제정한 조상 묘에 비를 세우는 것, 그리고 연호 등을 제정한 것이다. 이는 능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구민이 더욱 약(弱)질까 염려하니 만약 내가 죽은 후 (나의) 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단지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약탈(전리품 노획을 뜻함.)하여 온 바의 신래한예(新來韓穢)를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수묘와) 청소에 대비토록 하라. 이 명령에서 특기할 점은 수묘제를.. 2010.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