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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연구소285

[전경일의 신간]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제가 이번에 신간을 냈습니다. 한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2012년은 임진왜란 7주갑이자, 420주년이 되는 해! 경제전쟁의 승리자로 돌아온 이순신! 21세기 경제위기시대, 우리는 왜 이순신을 찾는가? 치열함과 탁월성의 경영, 경영학의 교범으로 이순신을 만나다. 필사즉생의 ‘이순신 정신’으로경제위기시대 글로벌 도전을 넘어 설 해법을 찾다! ………………………………………………………………………………………………………………………………. 기존에 알고 있는 ‘이순신 지식’은 거부한다! 통찰과 통섭의 시각으로 바라본 이순신 경제전쟁과 임진왜란의 전모를 밝히다! 거북선 R&D 센터 ‘골든 트라이 앵글’의 비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승리의 중심에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2011. 10. 26.
[이순신] 작은 첫출발과 원칙주의 이순신의 첫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무과 병과에 합격한 후 첫 관직은 마땅히 정9품인 효력부위(效力副尉)여야만 했다. 그러나 종9품인 권관에 임명되고 만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서반의 품계는 18품 30계로 되어 있다. 7, 8, 9품은 부위, 5, 6품은 교위, 3, 4품은 장군, 1, 2품은 대부로 되어 있다. (35~37쪽 〈조선시대 서반의 품계와 대한민국 현재 직급체계 비교〉 참조) 관직 초기부터 불이익이 함께 했지만, 장군은 이를 원망하거나 불만삼지 않았다. 오히려 피나는 자기 노력의 기회로 삼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력주의는 현실을 헤쳐 나가는 열쇠가 된다. 장군에 대한 일화가 있다. 첫 관직인 권관 때의 일이다. 당시 감사로 있던 이준백이 자기 관할 하에 있는 여러.. 2011. 10. 11.
[이순신] 이순신 장군의 통섭적 상상력 필자는 휴가를 이용해 남해 한려 수도 일대를 돌아보았다. 집필과 관련된 여행이었지만, 나름 휴가를 자청한 여정이기도 했다. 남해 일대에 들어서는 순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이토록 많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이순신’은 가까이 있었다. 400여 년 전의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자였던 이순신을 만나며 남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23전 23승의 무결점 완벽 승리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승리의 원천을 만들어 낸 ‘이순신적’ 힘은 어디서 온 것일지 궁금했다. 돌아와 자료도 찾고, 쓰던 글편들을 다시 훑으며 이순신적 힘은 인문과 타학문 분야가 결합된 ‘통섭형 발상’에 있음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익히 아는 거북선은 조선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함께 핵심 전선인데 배의 건.. 2011. 10. 6.
[이순신] 이순신 장군과의 만남 장군을 만나는 첫걸음은 장군의 생애를 돌아보는 일로 시작한다. 그 작업은 나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마음은 숙연해지고 담대해진다. 장군은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을까? 성장기, 남다른 우여곡절은 없었을까? 장군의 삶의 장대한 완결판을 보기 위해 나는 그 조촐한 첫출발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3월 8일 서울 마르내골(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이름은 순(舜). 중국 고대 성군인 순임금을 벤치마크 한다는 뜻에서 순신(舜臣)이라 지었다. 장군은 여덟 살 되던 때 충남 아산의 어머니 친정 동리로 이사해 글방을 다닌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이 이사를 가게 된 배경이다.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무(武)의 기상이 넘쳤다. 결혼한 후에도 글공부와 활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산 현충.. 2011. 9. 30.
[인조] 치욕을 갚는 방식을 네가 정령 몰랐단 말이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인조 정부는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는 양, 무모하게 명분론에만 집착했다. 이전 정권인 광해군 정부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듯 대외정책에서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 내부에서는 논공행상의 불협화음이 나타나 이괄의 난을 불어온다. 새로 집권한 세력에겐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생각 외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해서 백성들은 반정공신을 향해 “너희들과 (광해군 정부) 사람들이 다를 게 뭐냐?”고 반정공신들을 풍자하는 상시가(傷時歌)가 회자될 정도였다. 선조 이후 조선을 분열과 전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인조를 만나본다. -왕께서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는데, 국정 운영이 너무 형평성에서 멀어진 감이 있고, 권력의 독점 현상으로 결국 이괄이 난을 일으켰었는데요. “왜? 내가 아무 노.. 2011. 9. 14.
[광해군] 과연 명분으로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단 말이냐? 서자로서 임금이 된 아비 선조는 자신의 서자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전란 중에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이끌면서 실질적인 국왕으로서 전란을 관리해 냈지만, 왕이 될 기회마저 박탈당할 뻔한 광해군. 선조와 더불어 역대 조선 국왕 중에 가장 긴 기간 동안 궁궐 밖에서 보냈고, 몸소 전란의 현장을 뛰었으나 그에게는 운명적으로 명분에 가로 막힌 조선이라는 현실의 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조선의 15대 국왕, 광해군을 만나본다. - “하늘이 한 세대의 인재를 내는 것은 그들로서 한 세대의 임무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사대부들은 논의가 갈라져서 명목을 나누고 배척하는 데 거리낌 없으니 이제는 피차를 막론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하리라.” 임금께서는.. 2011.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