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경영89

변방에선 반드시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변방에선 반드시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여진 세력이 흥기한 것은 엄청난 악조건에서였고, 그것도 한족의 턱 밑인 동북면 변경에서였다. 여진족은 태생부터가 야생성과 관련이 깊다. 여진족의 이러한 야생성은 새로운 국가를 잉태하는 강력한 국가력(國家力)의 하나로 인식된다. 그것은 말(馬)을 통한 기동력과 사냥을 통한 잠재적 군사 훈련을 통해 강화된다.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둘러싼 이민족의 흥기는 바로 이 같은 악조건을 역으로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원이 없는 까닭에 대 중국 무역 이권을 장악하기 위한 여진사회 내부의 투쟁은 오히려 내부 경쟁력을 검증하고,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한족이 여진족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요새들은 여진족에게 새로운 축성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여진 .. 2012. 6. 7.
광개토경영의 핵심은 벡터와 점선면 전략 광개토경영의 핵심은 벡터와 점선면 전략 새해 벽초부터 중국이 그간 추진해 온 동북공정의 완결판으로 고구려사는 물론 발해사까지 중국사로 둔갑시켜 버리고 있어 한중간 갈등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광개토태왕 시기의 국가 경영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태왕은 어떻게 그 엄청난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을까? 태왕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태왕이 태어나 활동하던 시기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태왕은 서기 374년 출생하여 392년 5월 고구려의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즉위 시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로 소년왕이었다. 왕제(王弟) 시절에는 군중(軍中)의 한 장수에 불과했으나, 태왕이 왕이 된 배경은.. 2012. 3. 16.
[ 누르하치]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에 맞서다 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누르하치 시기에도 대(對)중국 무역은 활발해 약 2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여진족 사신들이 북경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만큼이나 영리한 방법으로 명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파악하고, 수집했다. 누르하치의 전략상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첩보전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우려해 명은 남여진의 북쪽 경계인 무순에다가 마시(馬市)를 세워 여진사신들이 만리장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또 망루를 세워 각기 5명의 군사로 수비케 하여 여진 부족원들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 경계하였다. 나아가 회유책도 동원했다. 이는 한족이 오랜 역사 동안 변방의 민족에게 써오던 지극히 일반적인 수법이었다. 예를 들어.. 2012. 3. 14.
[광개토태왕]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 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 지정학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다양한 자연환경이 만나는 매우 독특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문화도 이국적 요소가 산재해 있었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대홍안령 산맥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초원유목문화, 화북의 농경문화, 중국 양자강 유역의 남방문화, 그리고 한반도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영토 확장에 따라 수많은 종족들이 다양한 문화를 보존한 채 고구려제국의 백성이 되었으며, 고구려는 이들을 수용해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완성시킨다. 이종의 문화를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낸 것이다. 이는 점차 고구려 독창적인 문화로 발전해 나간다. 고구려 문화가 지닌 자유는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특성과 유목민족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었다. 이 같.. 2012. 3. 13.
[헌종] 세상의 격랑에 두 눈을 감고 격랑은 애써 외면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진 세파는 바로 부딪쳐야 살 방도를 찾게 된다. 헌종 연간(1834~1849년)은 조선이 후기로 치달을수록 내․외부적인 도전에 강하게 부딪치는 시기였다. 헌종은 효명세자(익종)과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해 8세의 어린 나이에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소년왕의 경우 으레 등장하는 외척의 발호와 부정부패는 헌종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헌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역시 대비로부터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지요? 그 만큼 왕권이 휘둘렸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떠셨는지요? “내 어린 나이에 국왕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청정을 받게 되었지. 11세가 되었을 때에는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며 안동 김씨의 세도 시대가 열렸고.. 2011. 12. 28.
[정조] 넘었으되 넘지 못한 선을 밟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의 죽음을 보아야만 했던 아들. 그 아들은 아비를 죽인 할아비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정치의 비정함을 몸소 깨달았던 아들, 아비의 묘소인 영우원을 참배할 때마다 옷소매를 적실만큼 울어댔던 아들, 아비의 죽음과 같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독살설’의 주인공이 되고만 아들. 조선의 제22대 국왕, 개혁군주 정조를 만나본다. -왕을 이야기할 때 ‘삼불필지설(三不必知設)’을 먼저 꺼낼 수밖에 없는데요. 세손 무렵일 때 정국은 어땠나요? “왕이 되기 전, 나는 한낱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소. 아비를 죽인 노론계의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 2011.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