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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430

[경성천도] 동양평화의 보전 동양평화의 보전 일본에 3대 사명이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양평화의 보전은 가장 중대한 사명이다. 그러나 이 곳 동양만큼 평화가 흔들리기 쉬운 곳은 없다. 이곳에는 세계 저기압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이 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수많은 국부局部 저기압의 중심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영일英日동맹이 있어 이 저기압을 어떻게든 진압하여 큰일로 번지지 않고 항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 여기에 미합중국이라고 하는 대 고기압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힘이 있는 것을 무기로 빈번히 주변 국가를 압박하며 특히 동양의 대 저기압인 중국을 노리고 단번에 커다란 야심을 채우려 한다. 그들은 야심을 채우는 첫 단추로써 오랫동안 동양평화를 보장해왔던 영일동맹을 폐기.. 2012. 3. 21.
광개토경영의 핵심은 벡터와 점선면 전략 광개토경영의 핵심은 벡터와 점선면 전략 새해 벽초부터 중국이 그간 추진해 온 동북공정의 완결판으로 고구려사는 물론 발해사까지 중국사로 둔갑시켜 버리고 있어 한중간 갈등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광개토태왕 시기의 국가 경영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태왕은 어떻게 그 엄청난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을까? 태왕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태왕이 태어나 활동하던 시기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태왕은 서기 374년 출생하여 392년 5월 고구려의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즉위 시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로 소년왕이었다. 왕제(王弟) 시절에는 군중(軍中)의 한 장수에 불과했으나, 태왕이 왕이 된 배경은.. 2012. 3. 16.
[경성천도] 도요카와 젠요의 <경성천도> 중에서 * 이 책은 1933년 일본 제국주의자가 저술한 책의 편역본으로, 시대상 및 관점이 일본 군국주의자의 시각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주의적 뿌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싣는다. 역사를 징비하고 경계하는데 참고자료가 되리라 믿는다. 1절 제국의 운명과 사명 인생에는 우리의 힘으로 자유롭게 좌우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우리의 힘으로 자유롭게 좌우할 수 없는 것을 운명, 숙명 또는 사리의 필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범인凡人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없는 것도 위인호걸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소위 ‘불가능이라는 말은 어리석은 사람의 사전에만 있다’고 갈파했던 나폴레옹의 명언이 바로 그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없는 일도 전체의 힘을 이용하면 좌우 .. 2012. 3. 15.
[경성천도] 역사를 아는 민족만이 살아남는다 80년간 봉금서封禁書! 국내 최초 완역본 출간 서문에 붙여 일제가 조선을 합병 한 후 23년 지난 1933년, 서울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앞에는 흥아興亞연구소라는 특수 목적의 조직이 비밀리에 꾸려진다. 서울대학교 앞에 이 연구소가 특별히 세워진 이유는 아직도 비밀에 붙여져 있다. 연구소의 수장 도요카와 젠요豊川善曄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책의 일환으로 이 1급 문건을 작성한다. 이 비밀 작업은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를 서울로 이전시켜 만주와 일본열도를 잇는 거점이자 대동아공영권의 중추로써 한반도를 영구 지배하려는 야심찬 공작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항구적 대륙경영을 위해 ‘일본과 만주의 통제공작에 화룡정점’을 찍으려는 계획 차원에서 벌어진 거대 음모였다. 이뿐만.. 2012. 3. 14.
[남왜공정] 일본의 한반도 침공 시나리오 역사는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교훈을 얻는다. 일시적 분(憤)에만 사로잡히거나,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적이 미울수록 적에 대한 본능적 거부 반응만 보인다고 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혐오(嫌惡)’가 부족해 오랜 시간 왜(倭)의 침략을 받아왔고, 근현대사에 이르러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뒤쳐진 게 아니다. 한․일사는 우리 역사의 한 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왜구’의 존재를 보다 명확히 꿰뚫어 볼 때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왜구와 일본의 연결성을 알 때 대응책도 찾을 수 있다. 쓰디쓴 자기비판은 냉혹한 역사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었지만 그 후 300년을 공상 속에서 위안 받고, 주관적 우월성에 빠져 구한말 합방.. 2012. 3. 14.
[ 누르하치]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에 맞서다 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누르하치 시기에도 대(對)중국 무역은 활발해 약 2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여진족 사신들이 북경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만큼이나 영리한 방법으로 명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파악하고, 수집했다. 누르하치의 전략상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첩보전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우려해 명은 남여진의 북쪽 경계인 무순에다가 마시(馬市)를 세워 여진사신들이 만리장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또 망루를 세워 각기 5명의 군사로 수비케 하여 여진 부족원들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 경계하였다. 나아가 회유책도 동원했다. 이는 한족이 오랜 역사 동안 변방의 민족에게 써오던 지극히 일반적인 수법이었다. 예를 들어.. 2012.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