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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연구소285

[현종] 무효경쟁으로 세월을 허비하니 정치의 본질은 실종되고 19세의 현종은 북벌을 강행하려 했던 아버지 효종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다.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효종의 죽음은 그 죽음의 미스터리 한가운데 있던 송시열과 산당의 존재가 있는 한, 현종 자신에도 닥칠 불행한 운명의 전주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위기간 내내 왕실의 의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조정은 날을 밝히고 있었고, 거기에 정치의 본질인 민생이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조선의 18대 국왕 현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재위 15년 동안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날을 세우다 시피하셨는데요. 정치의 근본이 그보다는 민생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디 이르다 뿐인가. 허나 예송논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네. 인조반정 이후 호란과 북벌이란 키워.. 2011. 11. 25.
[효종] 실행력이 부족한, 혹은 실행할 수 없는 자의 안타까움 형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달랐다. 달랐기에 다른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인지, 형을 밀어내고 왕으로 추대되었기에 형과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인지 의문은 남는다. 그의 아버지 인조의 바람대로 심양에 머물 때 형과 달리 소무(蘇武)처럼 행동한 그였기에 명분만 내세웠던 인조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조선의 17대 국왕 효종의 미완의 북벌을 만나본다. -형님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는 점이 왕의 차이 일 텐데요. 소현세자가 친청(親淸) 정책을 통해 실제에 기반한 정치를 펼치려 했다면 왕께서는 부친인 인조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보이시는데요? 우선 정치적 배경부터 살펴보시죠? “심양에 있을 때 나와 형은 완전히 다른 입장이었지. 형님은 나날이 강성해 가는 청을 보며 여기서 배울 게 많다, 우리 조선도 청을 통해.. 2011. 11. 25.
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1592년 4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적은 이튿날인 14일 부산진을 점령하고, 15일 동래부를 함락시킨다. 5월 3일에는 서울을, 28일에는 임진강을 건너 6월 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한다. 부산을 치기 시작해 개전 20일 만에 서울이 무참히 무너지고, 2개월 만에 개성, 평양까지 빼앗기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 것이다. 일일 평균 26km의 놀라운 속도로 적이 북상한 셈이니 특별한 저항 없이 통과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임란 초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렇다 할 방어 없이 밀리게 된 것일까? 임란 전 전쟁 발발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는 이견과 혼란은 있었으나, 나름 전쟁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89년 1월 조정에서는 불차탁용.. 2011. 11. 15.
위기의 현실화 위기의 현실화 1592년 4월 13일 왜군 15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하는 것을 시발로 임진왜란은 발발한다. 마침내 우려했던 전란이 터진 것이다. 이순신은 바로 보름 전인 3월 27일에야 대포 쏘는 시험을 했고, 하루 전에는 지자포와 현자포 발사 훈련을 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간신히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전쟁 개시 바로 전까지 부족하나마 준비역량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우리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한지 1년이 되는 때였다. 그렇다면 이 1년은 장군이 전란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이 짧은 기간 동안 장군은 어떻게 해전에 대비해 우리 수군의 준비상태를 파악하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이순신의 관직 경험을 보면, 발포만호.. 2011. 11. 14.
작은 지식이 세상을 구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이 존재하고, 그 지식은 나름 쓰임새가 있다. 어떤 지식은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지식인’들만의 것이 아닌,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다. 이런 작은 지식은 때로 생명을 구하는 등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이런 이야기는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북 수마트라 서쪽에서 지진이 일며 쓰나미나 몰아닥쳤을 때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날, 규모 9의 지진은 8분 동안이나 격렬하게 흔들며 그 지역 일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수마트라에서는 앞뒤로 흔들리고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하강 가속도보다 훨씬 빠른 상하진동 때문에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무너지는 주변 건물에서 피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해저가 갑자기 상승해 생긴 큰 파도는 항공기 속도인 시속 700킬로미터 .. 2011. 11. 1.
[이순신](전경일 소장) 임박한 전란과 준비역량 고향으로 내려온 이순신은 45세 되던 해 1월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는다. 조정에서 임진왜란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준비하려는 것과 북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불차탁용(不次擢用)’을 한 것이다. 불차탁용이란, 쓸 만한 무신을 특별히 관직의 서열을 밟지 않고 천거해 채용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순신은 북방지역의 전공으로 서열 2위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거되지 않았다. 대신 전라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임명된 후 조방장을 겸임하게 된다. 이후 잠시 선전관으로 재직하다가 유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 임명된다. 정읍현감은 이순신이 쌓아가는 경험 중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 무렵 정읍 현감 직을 수행하며 장군이 터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이순신은 치민(治民)의 명성을 얻게 된다. 백성을 다.. 2011.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