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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개별 승리보다는 전체 판세를 뒤집어라 한산대첩: 개별 승리보다는 전체 판세를 뒤집어라 한산대첩은 임진년 7월 6일부터 13일까지 8일간에 걸쳐 견내량 및 안골포에서 적선 89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한 쌍방 간 교전이 치열했던 대전이다. 견내량 해전은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주력함대 73척과 이순신 함대 56척간 결전이었다.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과 같은 큰 배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지형으로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조선수군에게 불리했다. 불리한 지형을 장군은 혁신적 전법으로 돌파한다. 나라의 운명을 건 대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저 유명한 혁신전법인 ‘학익진법(鶴翼陣法)’이 전면 등장하는 것이다. 원래 학익진은 육전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해전에 맞게 일부 변용되어 이용되어 왔다. 육지에서.. 2012. 9. 4.
당포해전: 거북선은 적진을 가르고 당포해전: 거북선은 적진을 가르고 당포해전은 사천해전을 시작으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을 포함한다. 이때 장군은 왜선 70여 척을 격파한다. 이 사천해전에서부터 저 유명한 거북선이 등장한다. 장군은 적의 형세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적은 이미 상륙해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산 밑에 벌여 놓았다. 적의 상태를 파악한 장군은 적과 아군의 위치, 조류, 공격방법 등을 판단한 다음, 유인작전을 펼치기로 작전계획을 세운다. 사천해전은 유인 섬멸이 주전략인데 그 진행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천에 이르러… 공은 아침 조수가 나갈 때라 큰 배가 뭍 얕은 항구로 들어가기 어려우므로 짐짓 패한 듯이 하여 꾀어내어 한바다에서 쳐부순다면 섬멸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드디어 나팔을 불며 배를 돌리니, 적이 예상한 대로.. 2012. 8. 7.
옥포해전: 경영자라면 태산같이 무거이 하라 옥포해전: 경영자라면 태산같이 무거이 하라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적은 다음 날 오전 전투를 개시해 불과 5시간 만에 정발(鄭撥)이 지키던 부산성이 떨어지자 파죽지세로 북상한다. 경상감사 김수가 4월 20일 이순신에게 공문을 보내 전라수군의 경상도 지역으로의 지원 출격을 조정에 상신했다는 전갈을 급히 보내온다. 왜적선은 500척에 달했지만, 이순신이 동원할 수 있는 함대는 고작 85척에 불과했다.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맞아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 미지의 싸움에 응하는 장군의 전략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군 병영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실전 훈련을 끊임없는 쌓는 것이었다. 수군조련도.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이라는 무결점의 완벽한 승리 뒤에는 철저하고.. 2012. 8. 6.
400년 전 핏빛 남녘바다 나는 묵시의 남녘 바다 앞에 서 있다. 해역엔 가득 안개가 끼이고 앞은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저 바다를 400여 년 전 이순신은 밤낮으로 노려보았으리라. 바다는 적이 들어오는 길목이자, 적의 병참선과 첩보선이 교활하게 암약하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터였다. 장군은 적을 찾아 섬과 뭍 사이를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 나는 저 바다에서 장군의 지난하기만 했던 삶의 궤적을 만난다. 23전 23승의 무결점의 승리를 이뤄 낸 장군의 주요 해전들을 돌아보며 경영자로서 경제위기에 맞설 힘과 혜안을 얻는다. 장군이 맞아 싸운 7년간의 주요 임진왜란 해전들을 돌아봄으로써 장군이 지닌 불굴의 필사즉생의 정신과 지혜를 얻고자 한다. 1차 출전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 합포해전 (4.. 2012. 8. 1.
조선시대 무관직과 이순신 품계 조선시대 무관직 과거로 등용되는 무관은 대개 부위, 교위를 거쳐 장군이 된다. 종4품으로 승진하여 처음 장군이 되면 그 보직에는 일반적으로 만호(萬戶)가 주어진다. 장군으로 계속 승진하여 정3품 상계(上階) 절충장군이 되면 비로소 당상관(堂上官)으로 대우 받으며 령공(令公) 또는 영감(令監)으로 불린다. 또 승진하여 종2품 가선대부가 되면 동반(東班)의 품계와 구분이 없어진다. 이후 다시 승진하여 정2품 자헌대부가 되면 이때부터 대감(大監)으로 불리고 사후에도 시호(諡號)를 받는 등 특별대우를 받는다. 이러한 무관의 품계와 승진체계는 수군이나 육군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었던 게 임란 당시의 제도였다. 임진왜란 전 이순신의 품계 이순신은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동구비보의 종9품 권관(權官)부터 .. 2012. 6. 21.
[이순신] 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1592년 4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적은 이튿날인 14일 부산진을 점령하고, 15일 동래부를 함락시킨다. 5월 3일에는 서울을, 28일에는 임진강을 건너 6월 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한다. 부산을 치기 시작해 개전 20일 만에 서울이 무참히 무너지고, 2개월 만에 개성, 평양까지 빼앗기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 것이다. 일일 평균 26km의 놀라운 속도로 적이 북상한 셈이니 특별한 저항 없이 통과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임란 초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렇다 할 방어 없이 밀리게 된 것일까? 임란 전 전쟁 발발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는 이견과 혼란은 있었으나, 나름 전쟁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89년 1월 조정에서는 불차탁용.. 2012.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