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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428

[이순신] 이순신 장군의 통섭적 상상력 필자는 휴가를 이용해 남해 한려 수도 일대를 돌아보았다. 집필과 관련된 여행이었지만, 나름 휴가를 자청한 여정이기도 했다. 남해 일대에 들어서는 순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이토록 많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이순신’은 가까이 있었다. 400여 년 전의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자였던 이순신을 만나며 남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23전 23승의 무결점 완벽 승리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승리의 원천을 만들어 낸 ‘이순신적’ 힘은 어디서 온 것일지 궁금했다. 돌아와 자료도 찾고, 쓰던 글편들을 다시 훑으며 이순신적 힘은 인문과 타학문 분야가 결합된 ‘통섭형 발상’에 있음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익히 아는 거북선은 조선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함께 핵심 전선인데 배의 건.. 2011. 10. 6.
[이순신] 이순신 장군과의 만남 장군을 만나는 첫걸음은 장군의 생애를 돌아보는 일로 시작한다. 그 작업은 나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마음은 숙연해지고 담대해진다. 장군은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을까? 성장기, 남다른 우여곡절은 없었을까? 장군의 삶의 장대한 완결판을 보기 위해 나는 그 조촐한 첫출발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3월 8일 서울 마르내골(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이름은 순(舜). 중국 고대 성군인 순임금을 벤치마크 한다는 뜻에서 순신(舜臣)이라 지었다. 장군은 여덟 살 되던 때 충남 아산의 어머니 친정 동리로 이사해 글방을 다닌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이 이사를 가게 된 배경이다.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무(武)의 기상이 넘쳤다. 결혼한 후에도 글공부와 활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산 현충.. 2011. 9. 30.
[인조] 치욕을 갚는 방식을 네가 정령 몰랐단 말이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인조 정부는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는 양, 무모하게 명분론에만 집착했다. 이전 정권인 광해군 정부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듯 대외정책에서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 내부에서는 논공행상의 불협화음이 나타나 이괄의 난을 불어온다. 새로 집권한 세력에겐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생각 외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해서 백성들은 반정공신을 향해 “너희들과 (광해군 정부) 사람들이 다를 게 뭐냐?”고 반정공신들을 풍자하는 상시가(傷時歌)가 회자될 정도였다. 선조 이후 조선을 분열과 전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인조를 만나본다. -왕께서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는데, 국정 운영이 너무 형평성에서 멀어진 감이 있고, 권력의 독점 현상으로 결국 이괄이 난을 일으켰었는데요. “왜? 내가 아무 노.. 2011. 9. 14.
[광해군] 과연 명분으로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단 말이냐? 서자로서 임금이 된 아비 선조는 자신의 서자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전란 중에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이끌면서 실질적인 국왕으로서 전란을 관리해 냈지만, 왕이 될 기회마저 박탈당할 뻔한 광해군. 선조와 더불어 역대 조선 국왕 중에 가장 긴 기간 동안 궁궐 밖에서 보냈고, 몸소 전란의 현장을 뛰었으나 그에게는 운명적으로 명분에 가로 막힌 조선이라는 현실의 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조선의 15대 국왕, 광해군을 만나본다. - “하늘이 한 세대의 인재를 내는 것은 그들로서 한 세대의 임무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사대부들은 논의가 갈라져서 명목을 나누고 배척하는 데 거리낌 없으니 이제는 피차를 막론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하리라.” 임금께서는.. 2011. 9. 14.
복식조가 승리하는 시대 경영전략 전문가인 미시건대 경영대학원의 프라할라드 교수는 “영원한 경쟁우위 요소는 없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원천을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끊임없는 혁신이 생존에의 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혁신은 개선사항을 찾고 효율성과 생산성을 올리는 다분히 대량생산체제에서의 이노베이션을 뜻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창조시대에는 이노베이션이 아닌, 인벤트를 통해 문제에 접근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혁신의 보다 광의적인 개념인 창조는 실리콘 밸리의 경우 우리보다 대략 10여년은 앞서 있는 느낌이다. 그간 우리는 벤치마킹 해 온 것의 효율성을 강화하는데 혁신이란 말을 제한적으로 사용해 왔다. 실리콘 밸리 열풍이 불던 1999년《산호세 머큐리 뉴스》지에 실린 휴렛 팩커드사의.. 2011. 8. 25.
너의 다원성을 불러내라 우리나라 대학의 학과와 전공 교수의 특징을 밝힌 보고서를 읽고는 깜작 놀랐다. 2006년 2월 기준, 수도권 대학 경제학과 교수 중 미국 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85.7%에 달했다. 흔히 주류경제학이라 불리는 이론을 전공한 비율은 90.5%이고, 아예 100% 미국 박사만으로 경제학 교수진이 채워진 대학도 6곳(경희대, 중앙대, 단국대, 동덕여대, 홍익대, 서울여대)이나 된다고 한다. 지금은 좀 바뀌었을까? 지금 분위기에서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벗어난 경제 질서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세계 경제가 다원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과 달리 조사 할 무렵만 해도 우리는 지나치게 편중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다. 학문에 있어서도 편식이 작용할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2.. 2011.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