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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430

직무 역량과 리더십에 따른 지위 해녀 사회는 기업의 인력개발과정처럼 역량과 업적 평가가 철저히 이루어진다 해녀사회의 계층은 물질 역량에 달려있다. 능력에 따라 하군․중군․상군으로 구분된다. 굳이 ‘군(軍)’이라는 군대조직을 연상시키는 명칭으로 나뉜 점이 특이하다. 그만큼 계층 구분이 엄격하다. 거친 바다에서 일하는 산업전사라는 뜻이 반영된 것일까? 물질은 거대한 대자연과의 목숨을 내건 싸움이자, 전쟁과 다를 바 없다. 마치 기업에서 신입사원이 입사해서 관리자를 거쳐 임원과 경영 리더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준비된 해녀만이 깊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의 대격투에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뒤따른다. 응분의 보상은 그럴 때 찾아온다. 바닷가에서 헤엄치던 소녀는 물질을 통해 어엿한 해녀로 성장한다. 해녀사회에 첫.. 2010. 7. 20.
강자는 변방에서 출현한다 중국의 오랜 전략 중 하나는 주변 세력들이 강한 힘으로 결집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한족은 타민족의 단결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 한족은 그 자체로 중국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변방에서 새로 생겨나는 힘과 그것을 막고자 하는 한족 내부의 힘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중국 지배 권력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족의 중국을 중국 전체로 이해하는 것은 중국을 형성하는 다양한 힘을 무시하는 태도다. 외부의 힘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법으로 한족이 취한 정책이 바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였다. 그러나 이 같은 한족의 정책은 내부에로 눈을 돌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변방에 소홀한 틈을 타 그동안 감추어왔던 세력들은 그 모습.. 2010. 7. 19.
강릉 바우길을 갔다 왔습니다. 강릉 바우길을 갔다 왔습니다. 요즘엔 지방마다 올레길처럼 숨은 길을 개발해 내더군요. 지역 사람들이 개발한 길이라는데, 산을 타는 것이라기보다는 걷는 길(등산용어로는 워킹(Walking)이라고 하지요)이 이어지더군요. 솦밭도 보이고, 바위 틈새를 비집고 나와 자신을 막아섰던 바위마저 갈라버린 역전의 소나무도 보고, 불탄 숭례문 복원에 쓰인 장송들이 베어진 자리에 언젠가의 쓰임새를 위해 예약된 낙낙장송들이 늘어서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베기 전에 저렇게 예의를 표하고, "어명을 받으시오!"한 다음 베어야 나무도 순순히 목을 내어 준다고 하더군요. 몇 십년에서 근 700년 된 나무들을 베어낼 때에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겠더군요. 산 너머로 대관령 풍차도 보이고, 숲길은 계속이어지고... 아래에 내려오니 이.. 2010. 7. 17.
글로벌 토종, 토종 글로벌을 찾아서 세계화 시대에 로컬은 어떤 양상일까? 제주도 한라산을 오르면 주위를 둘러싼 크고 작은 오름들을 볼 수 있다. 내겐 그 광경이 흡사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을 둘러싼 로컬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시간, 장소, 특정기업, 인종, 사상, 체제를 떠나 자본이 절대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다면 가장 적당한 곳으로 이동하며 새로운 시장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게 세계화의 본질이다. 그러다 보니 그 결과로 로컬의 강화 내지 반대급부로 초토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금융자본, 유통자본, 산업자본의 슈퍼파워 뒤에는 주주만능주의, 비정규직의 양상, 양극화, 야만적 투기자본, 서구적 경영이론이 판치고 있다. 나는 이 점을 이미 얼마 전 출간한 경영 칼럼에서 지적한 바 있다. “글로벌이 단일 네트워크로 이어지며 사업기회, 자산이동.. 2010. 7. 5.
죽을지언정 굴신하진 않는다 누르하치는 후금이 생기기 전 요(遼)에 맞서 금을 일으킨 아골타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선 이들은 모두 강력한 리더십으로 흩어져 있던 제 부족을 통합했다. 이들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남여진 지역으로 이동하려했으나, 그들의 진로는 한족에 의해 저지되었다. 불만은 여진사회 내부의 경쟁 원리를 통해 통합으로 이어졌고, 길들여지지 않는 오랑캐식 사고는 결국 중국에 무작정 목줄만 잡히고 있지 않았다. 요 최후의 황제가 1112년 사냥차 북부 여진의 송화강 유역을 방문했을 때, 황제는 여진족 추장에게 춤을 추어 보이라고 명령했다. 아골타는 춤추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아골타는 뼈에 사무친 치욕을 갚아줄 날을 기다렸다. 1115년 그는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요를 공격, 마침내 요를 멸망.. 2010. 7. 4.
대륙경영을 향한 드높은 상무정신 중국 한인(漢人)들의 기록인 에는 “고구려인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고 적혀있다. 또 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보통 걸음걸이가 마치 달리는 것 같다.“는 기록이 나온다. ‘걸으면 뛰고 뛰면 싸우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매사에 얼마나 신속한 자세를 보여주었는지 알게 한다. 절을 할 때에도 발 하나를 빼고 한다고 했는데, 이는 유사시 다음 동작을 민첩하게 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구려인은 매사에 빈틈없었다. 고구려인과 달리 중국에 협조적이었던 부여인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가 함이 있고 너그럽다고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인들을 얼마나 눈엣 가시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고구려 사람들은 상무정신이 드높아 무예를 숭상했다... 2010. 7. 4.